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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온 편지 #7 여름, 제주에서의 어느 하루
#7 여름, 제주에서의 어느 하루
습관적으로 맞춰놓았던 알람을 꺼두고 모처럼 늘어지게 자야지 마음먹었더라도, 창가를 기웃거리는 햇살과 재잘대는 새소리에 저절로 눈이 떠질 거에요. 하지만 달콤한 아침잠을 방해했다고 뿔이 나지는 않을걸요. 당신은 아마도 창을 활짝 열어 아침햇살을 방 안 가득 들여놓고는 새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밖으로 나가보겠죠. 새들이 놀라 날아가지 않도록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야 해요. 참새가 모여 앉은 큰 나무 아래로 까치가 먹이를 쪼고, 이따금 꼬리가 멋진 꿩이 낮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와 먹이를 다툴지도 모르겠어요.
#7 여름, 제주에서의 어느 하루1. 황우지 해안에서 스노클링을 즐기는 사람들
이제 당신은 아침의 숲으로 가세요. 비자나무 향 은은한 비자림도 좋고, 키 큰 삼나무 빽빽한 사려니숲길도, 숙소 근처의 아무 숲이라도 좋아요. 초록의 이파리들 사이에서 새빨간 무언가를 보았나요? 맞아요, 산딸기. 한 움큼 따서 아껴 먹으며 걸어보세요. 당신보다 조금 일찍 잠에서 깬 나무들이 싱그러운 숨을 내뿜어 어제까지의 당신을 씻어주면, 비로소 당신은 여름 제주의 여행자가 된 거에요.
숲에서 나오는 길에 굳이 맛집을 검색할 생각인가요? TV에 ‘제주 맛집’으로 꽤 많은 식당들이 소개되었지만 땡볕에 한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보상해줄 만큼 대단히 맛있는 집은 손에 꼽을 정도에요. 그나마도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양은 줄고 가격은 비싸진 집들이 많죠. 그보다는 길가에 무심히 ‘00식당’이라 적힌 간판을 걸어놓은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보는 건 어떨까요. 제주의 일반적인 식당엔 대부분 ‘정식’이라는 메뉴가 있는데, 6~7천 원 정도의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제철 채소와 해조류로 만든 밑반찬, 생선구이, 매콤하게 볶아낸 제육볶음 등을 국과 함께 내주지요. 점심시간 무렵 렌트카가 아닌 차들이 서있는 집이라면 더 믿을 만합니다. 제주도민들이 찾아가는, 소위 가성비 좋은 집이란 뜻이니까요.

#7 여름, 제주에서의 어느 하루2. 투명하게 맑은 바닷물
태양을 따라 해변으로 달려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주의 여름바다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요. 서해처럼 얕고 완만한 수심에 동해처럼 맑은 물, 무뚝뚝한 현무암 바위를 지나 하얗고 보드라운 모래가 비쳐 청량하게 반짝이는 제주바다는 볼 때마다 탄성이 터져나옵니다. 굳이 첨벙거리며 뛰어들지 않아도 캠핑의자 하나와 맥주 한 캔만 있으면 이 바다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기에 충분하죠. 혹 제주바다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스노클링 포인트를 찾아가세요. 토박이 아저씨들 사이에 슬쩍 끼어 해보는 낚시질이나 물 빠진 백사장에서의 조개 줍기도 재미나지요. 무엇을 하든 해가 저물 때까지 해변을 떠나지 말기를 권해요. 올여름 유난히 비가 적어서인지 저녁노을이 얼마나 예쁘게 타는지요. 핑크빛 노을이 구름과 하늘과 바다를 차례로 물들이고 마침내 당신의 온몸을 물들이면, 떠나왔음에 새삼 가슴이 벅차올 거에요.
제주로 이주하기 3년 전, 오랫동안 세계 여러 곳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생활에선 필요 없는 일이라고, 시간낭비일 뿐이라고 여겼던 일들이여행에선 중요하더군요. 길바닥에 주저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거나, 모르는 사람과 인사를 나눈다거나, 낯선 풍경 앞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다거나, 햇살 아래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낮잠을 잔다거나. 그런 하찮은 것들이 여행을 촘촘하게 엮고 기억을 두텁게 만들었어요. 같은 시간, 다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에 마음을 열어 공감했고, 익숙한 곳으로부터 떠나온 사람들과의 동지애로 위안을 얻었습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고 다행이어서 깊은 숨을 내쉬었고, 골고루 친절한 햇살과 바람 속에서 잠시나마 이방인임을 잊을 수 있었죠. 그리곤 다짐했습니다. 여행자처럼 살아가겠다고. 공감하고 위로하고 새삼스러워하며, 그렇게 늙어가야겠다고.

#7 여름, 제주에서의 어느 하루3. 우거진 수풀 사이에 수줍게 열린 새빨간 산딸기
바다가 눈부신 날이나, 구름이 어여쁜 날이나, 노을이 불타는 날, 여기 제주 이주민들의 SNS엔 똑같은 사진들이 앞 다퉈 올라옵니다. 매일 보는 바다이고 구름이고 노을인데도 새삼스럽게 또 마음을 빼앗길 수 있음에 놀라고, 그 시간 모두가 같은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음에 놀랍니다. 제주에서 이주민들은 생활자인 동시에 여행자인 게지요. 당신도 여기 제주에선 관광객이 아닌 여행자가 되어 일상에선 쓸데없다고 여기던 일들로 시간을 탕진해보길 바래요.
어느새 푸른 어둠이 내려앉은 바닷가. 수평선은 고깃배들이 밝힌 집어등 불빛으로 대낮처럼 환해집니다. 가까이 보이는 건 한치잡이 배, 멀리 보이는 건 갈치잡이 배라더군요. 고소한 갈치회와 얼음동동 한치물회 한사발로 저녁을 대신하면 기분 좋은 소름이 오소소 끼쳐올까요.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어두울수록 좋을 거에요. 밤하늘을 날아다니며 춤추는 반딧불이들을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조용한 밤, 반딧불이의 빛나는 꼬리를 좇다가 올려다본 하늘엔 은하수가 흐르고 있겠죠.

#7 여름, 제주에서의 어느 하루 4. 하늘에 불을 놓은 듯 타오르는 제주의 저녁 하늘
제주앓이, 제주살이… 모두들 제주의 삶을 동경하듯 말하지만 낯선 곳에 정착한다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바람 많고 습기 많은 날씨, 별스럽게 배타적인 섬사람들, 같은 이주민들끼리도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갈등과 상처, 느닷없이 찾아오는 외로움까지.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견디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자연입니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수많은 각자에게 꼭 필요한 만큼의 위안을 주는 제주. 이 여름의 어느 하루, 힘들었던 당신도 이곳에서 위로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송혜령 방송작가글을 쓴 송혜령은 방송작가로, 대학 졸업 후 십수 년간 TV 교양 프로그램과 토크쇼ㆍ다큐멘터리 등을 만들면서 세상 사는 법을 배웠고, 독서와 여행을 통해 세상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마흔 살이 되던 해 하던 일을 작파하고 주위의 부러움과 우려와 억측 속에서 남편과 함께 1년간 세계 여행을 감행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1년 만에 제주도로 이주, 동쪽 바닷가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여행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작가 블로그http://blog.naver.com/coolcool220 (클릭하면 블로그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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